2015.08.28 ~ 2015.10.25
전시소개
갤러리로얄에서는 10월 말까지 이병찬 작가의 개인전을 개최합니다.
이병찬 작가는 산업폐기물의 대표적 상징인 비닐과 라이터로 '도시생명체' 괴물 연작을 만들고 있습니다. 이번 전시에서는 작품과 작품이 배치된 장소가 갖는 특수한 긴장관계에 주목한 신작들을 선보입니다.
소비 사회의 변두에서 욕망의 중심으로
괴물, 진화하다
노진구
이병찬을 다시 만나게 된 것은 지난 4월경이다. 당시 그는 코너아트스페이스에서 개인전 <거울 너머 환각>을 열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이병찬은 ‘도시생명체’라는 주제를 가지고 괴물 연작을 만들고 있었다. 전시를 보며 내가 흥미를 느꼈던 부분은 작품 그 자체라기보다는 작품과 작품이 배치된 장소가 갖는 특수한 긴장관계였다.
괴물은 바깥으로 통유리창을 낸 쇼윈도 안에 있었고, 쇼윈도 너머로 4차선 도로 건너편에는 대형쇼핑몰 빌딩이 있었다. 괴물이 전시된 빌딩의 위층에는 자본주의의 첨단이라고 할 수 있는 성형외과병원이 입주해있다. 소비의 엔트로피 속에서 탄생한다는 괴물에게는 최적의 생태계가 아닐 수 없다. 괴물은 쇼윈도를 마주하고 대형쇼핑몰과 대치하고 있었고, 성형외과가 들어선 빌딩이 괴물을 배양(incubating)하고 있는 셈이다. 이병찬은 대담하지만 조용한 방식으로 전시실을 둘러싼 장소적 특성을 자신의 미적 공간에 수용했다.
그러고 보면 이병찬의 작업은 육안에 보는 괴물의 모습보다 어떠한 배경 속에서 괴물이 어떻게 보이는지를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지난번 전시의 키워드는 ‘환각’이었고 이번 로얄 갤러리에서는 ‘왜곡’을 중심 주제로 잡았다. 도시생명체 연작에서 작품의 의미는 언제나 괴물 자신에 있지 않고, 괴물과 적극적으로 관계를 맺는 주변부에서 획득된다. 이번 전시도 크게 다르지 않아서, 이병찬은 괴물 자체의 모습보다는 괴물과 주변부의 관계에서 이야기를 전하려고 시도한다.
그런데 괴물은 ‘왜곡’과 무슨 관계일까. 작가노트에서 그는 마곡지구에 살면서 겪은 이야기를 소개한다. 오래된 주거공간에 살고 있던 그는 단골 식물원에서 조만간 이 주변지역이 재개발될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한다. 주민들이 갖는 재개발에 대한 희망은 작가에게는 매우 낯설게 느껴졌는데, 그들은 재개발로 인한 경제적 보상이 모든 삶의 문제를 해결해줄 것처럼 믿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는 여기서 “존재하면서도 존재하지 않는 블랙홀”을 봤다고 증언한다. 이 블랙홀은 괴물을 탄생하게 만드는 원초적 에너지, 모든 것을 왜곡하는 욕망 그 자체다. 이병찬 작가는 재개발지구에 대한 사람들의 근거 없는 낙관론을 색색의 비닐봉투로 만들어진 괴물과 포장필름에 의해 불완전하게 반사되는 괴물의 이미지로 비유한다.
전작에는 소비의 엔트로피의 찌꺼기에 불과했던 괴물은 이번 전시에는 소비 욕망의 중심에서 나타났다. 이번 전시에서는 또 하나의 장치가 추가되는데, 그것은 유령처럼 괴물을 감싼 기와지붕이다. 이 지붕은 괴물을 보호하는 껍질이면서 동시에 괴물을 가두고 있는 것으로, 현실적인 상대역을 찾자면 재개발의 대상이 되는 낡은 집을 떠올리게 한다. 이 기와지붕은 그 자체로 생명을 잃은 모습이지만, 괴물이 사는 공간과 현실 세계 사이에 얇게 처진 외벽으로서 괴물이 살아가는 환상의 공간을 지탱한다. 이것은 알과 병아리의 관계와 같다. 알은 병아리를 보호하지만, 병아리는 끝내 껍질을 깨고 현실과 마주해야 하는 운명이다. 그러나 병아리와 달리 비닐봉지와 공기로 만들어진 괴물이 현실 속에서 얼마만큼 생존할 수 있을지는 모른다.
이병찬의 괴물은 소비사회 속에서 점차 진화해가고 있었다. 그만큼 괴물은 보기 흉해졌고, 비대해진 동시에 연약해졌다. 솔직히 나는 괴물을 보며 이질감을 느끼기보다는 친근감과 연민을 느낀다. 그것을 보면서 나는 끝내 외면하고 싶은, 그러나 결코 떨쳐낼 수 없는 내면의 음울한 표정을 바라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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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가 김기홍
물이 차 있는 큐브 안에서 움직이고 있는 아름다운 여성이 전시공간에 실재한다. 아니, 실존하는 여성과 그녀의 움직임이 실재하는 전시공간과 관람객 사이에서 움직이고 있다. 근래에 본 디지털 설치작품 중에 존재의 생성을 보여주는 멋진 작품이었다. 실재화(증강현실)가 범람하는 오늘날 미디어의 본질과 양태에 따라 다양한 실존류들이 탄생하고 있다.
이병찬작가는 실존할 수 없는 맥락상의 유기체를 현존하는 공간에서 유추할 수 있는 motive와 재료를 통해서 창조시킨다. 이는 위에서 말한 부재의 실존을 만드는 방법과는 또 다른 메디움(매개체 양태)을 지니고 있다. 현실공간에 기초한 실존은 양방향 소통을 가지며 기존의 실존과 같은 맥락의 메디움을 가지려 하는 성격을 띤다. 디지털 미디어설치는 기존의 실존들과의 소통과 반응을 통해 실존의 그룹에 포함되며, 기존의 메디움과 다른 특정한 불 소통을 통해 또 다른 실존류로써의 특성을 가지게 된다.
이병찬작가가 탄생시킨 동시대의 실존은 이질적 형상과 폐기된 자본주의 사회의 몰가치성을 대표하는 재료를 통해 새로운 실존류를 선보였다는 특징을 갖고 있다. 더불어 같은 공간 안에서의 소통이라는 점에서, 움직임에 의해 발생하는 사운드와 함께, 밀도 있게 공간을 점유하고 있는 공기의 움직임을 통해 숨을 쉬고 있다는 동질적 소통 메디움을 강조한다. 이는 단지 시각적인 존재의 확증과 디지털 사운드를 통한 청각적인 메디움의 확장을 통한 현실공간으로의 투영이 보여주는 실존류와는 괘를 달리한다고 볼 수 있다. 실재과 비실재(디지털과 아날로그)의 접점이 어디에 위치하고, 그 위치선상에서 기존의 실존들과의 메디움의 카테고리를 어떻게 공유, 소통하는지가 신 존재의 실존류를 결정짓는 잣대라고 한다면, 이병찬 작가의 작품은 기존의 메디움을 바탕으로 자본사회에 몰가치화로 재단된 개체의 변이를 통한 재생성을 볼 수 있다. 게다가 이번 이병찬작가의 작품에는 공간의 왜곡을 통해 신 존재의 소통 메디움의 또 하나의 확장을 가져왔다. 이 메디움의 확장은 결국 기존의 잣대로 여겨진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접점들의 선상에 접점의 다변화를 가져옴으로써 단지 어느 선상에 삽입된 박제된 실존류의 움직임이 아니라, 소통의 접점들을 찾아가는 진화하는 실존류로써의 가능성을 보고 있는 것 같아 더 흥미롭다.
공간왜곡
이병찬 작가노트
어느 날 작업실 주변 상인이 말했다.
“마곡지구가 개발되면 동네가 좀 나아지지 않을까요?”
그러고 보니 동네 곳곳으로 여기저기 걸려있는 마곡지구 투자현수막이 많이 있었다. 나에게는 단지 길 막히는 짜증나는 현수막이었지만 사람들에게는 초대형 사탕 같았다. 허허벌판인 마곡지구가 어떻게 될 줄 알고 벌써부터 그런 기대를 하는 걸까. 우주에서는 엄청난 질량을 지닌 물체가 주변 시공간을 왜곡하고 있다고 한다. 마곡지구 근처로 아직 보이지도 않는 물체에 벌써부터 공간이 끌어당겨지고 있는 것 같았다. 마치 볼 수 없기에 존재하면서도 존재하지 않는 듯한 블랙홀처럼 말이다.
도시에서는 반대로 블랙홀이 엄청난 질량을 가진 물체로 바뀌는데, 그것을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맨땅에 거대 시멘트 덩어리가 생기는 것이다. 내가 다닌 학교는 두바이 코스프레 하는 동네에 있었다. 길쭉한 크레인들 말고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동네였지만 사람들은 땅을 신처럼 숭배하며 공간변화에 막연한 기대를 하고 있었다. 그러다 동네에 길쭉하고 거대한 시멘트 덩어리가 등장했다. 사람들은 신나했다. 기우제 끝에 비가 내리는 것처럼 숭배의 보람을 찾는 듯했다. 길쭉한 아파트는 동네를 변화시켰다. 일대에 수많은 투자 현수막이 걸렷고 여기저기 경제도시라는 문구가 남발했다.
그 주변에 있던 학교는 이제 질 좋은 교육 서비스로 유명한 학교가 되겠다고 했다.
이제 그 길쭉한 시멘트는 단순한 시멘트가 아닌 것 같았다. 심시티에서도 해낼 수 없는 기능들을 활성화시키는 시멘트는 마치 해처리 같았다. 해처리 주변으로 점점 퍼져나가는 크립들처럼 소비생태계에서의 상품은 그 일대를 변모시켜나갔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크립을 퍼트리는 해처리는 숭배의 대상이 아닌데, 소비생태계에서는 숭배의 대상처럼 느껴진다는 것이다. 낡은 중동의 신이 아닌 현대적이고 근대적인 신으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