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4.05 ~ 2018.04.29
전시소개
부드러운 조형적 혁명, 또는 의식의 저항
하계훈(미술평론가)
우리는 예술가들의 창작의 근원이 주로 작가 내부의 자연발생적인 창작의지에 의한 것이냐 아니면 작가의 활동을 둘러싼 환경에 의해 더 영향을 받는 것이냐에 대해서 양측 입장이 대립하기도 하고 때로는 절충하기도 하면서 예술가들의 창작활동과 그 결과로서 탄생하는 작품을 해석하고 설명하려고 무던히 애써왔다. 필자는 이혜민의 작품에서도 작가의 창작과 관련하여 이러한 해석의 틀을 대입해보고 싶은 유혹을 떨쳐버리기가 쉽지 않다.
이혜민의 작품은 크게 몇 가지 그룹으로 분류된다. 작가의 대표적인 작품이라고 할 수 있는, 자투리 천을 이용하여 만든 베개를 하나의 유닛으로 삼아 수많은 베개들이 자기증식 형식의 확장을 보여주는 작품과 그러한 베개를 브론즈로 캐스팅한 작품, 그리고 이러한 베개들이 집합적으로 화면에 도입되어 부조적 화면을 이루는 작품과 석고 붕대를 이용하여 화면 가득 선형 혹은 원형의 단색 화면을 만들어내는 평면 작품 등이다. 작가 자신의 정체성을 투영한 이러한 작품들을 구성하는 대표적인 재료는 베개를 구성하는 자투리 천과 물과 접촉함으로써 굳어지는 석고붕대라는 두 종류의 패브릭이라고 할 수 있다.
작가는 이러한 재료의 소박함과 부드러움을 다루지만 작품으로 완결되는 결과는 작고 부드러우며 보기에 따라서는 그저 하찮은 마티에르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스펙터클한 서사와 힘을 느낄 수 있게 해주는 설치와 입체 작품으로 나타난다. 작가는 이러한 재료의 역설을 자신의 작업의 주요한 주제로 해석하는 것을 허용하고 있다. 마치 미국의 여성작가 루이스 부르주아가 우리 삶의 인간관계에서 발생하는 기억과 고통을 역설적으로 표현하면서 자신의 내면을 드러내 보여주듯이 이혜민은 부드럽지만 강력해지는 오브제로서 베개를 브론즈로 캐스팅한다든지 석고붕대를 물에 적셔 딱딱하게 굳힌 형상을 공간에서 드로잉하듯이 집합시키는 방식으로 자신의 메시지에 힘을 주입한다.
누군가 말한 것처럼 우리는 작가 개인의 사적인 역사와 작품을 분리해서 바라볼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관점은 이혜민의 작품에도 적용 가능할 것이다. 작가가 말해주는 학창시절과 졸업 후의 결혼 생활, 육아와 창작의 전쟁같은 동행, 그리고 부상, 이러한 개인의 역사가 곧 그 작가의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작가의 작품을 한눈에 바라보면 무엇보다도 우선 눈에 들어오는 것은 베개 작업이지만 이야기의 시작을 석고붕대로 잡아보자.
거즈에 석고를 묻혀 골절이나 통증을 겪는 환자의 환부를 감쌀 때 물을 묻히면 금세 딱딱하게 굳어지는 석고 붕대는 값싸고 일회적이며, 미학적이라는 표현과는 잘 부합하지 않는 창작의 재료다. 그렇지만 이러한 재료가 이혜민의 손노동에 의해 화면에 가득히 펼쳐짐으로써 석고붕대는 웅장하면서도 화려하게 변신하다. 흰색의 석고 붕대로 표면을 가득 채운 화면에서 관람자들은 신부의 눈부신 웨딩드레스를 상상하기도 하고, 좀 더 가까이 다가가면 석고붕대를 한 땀 한 땀 꿰매듯 붙여 나아간 작가의 손의 궤적과 그 위에 비춰지는 조명이 만들어내는 이미지에서 일종의 공간적인 드로잉을 읽기도 한다.
이혜민의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손노동의 깊이와 이러한 작업을 통해서 평범하거나 볼품없는 재료들이 개인의 역사를 말해주고 관람객과 소통하여 공감하게 해주는 작품으로 탄생하는 과정은 일면으로 1960년대 말에 이탈리아에서 시작한 아르테 포베라(Arte Povera)와 접점을 이루는 측면이 있다. 이탈리아 비평가 제르마노 첼란트(Germano Celant)가 만들어낸 이 용어 안에는 1968년 운동으로 대표되는 시대의 반항적인 성격과 이탈리아의 상황이 강조되고 있지만, 이와 함께 그 표현의 방법론에 있어서 일상의 소소한 재료들을 작품의 반열에 올려놓고, 그럼으로써 일상의 평범함을 새로운 힘으로 바라볼 수 있게 우리들의 눈을 새로운 지평으로 이끌어준다는 점에서 이혜민의 작품들과 무언가 공유되는 부분이 있다.
이혜민이 작가의 창작을 둘러싼 정치나 경제 등 거시적인 시대적 환경을 고려하였는지는 모르지만 작가 개인의 일상과 환경에서 작은 창작의 혁명을 꿈꿔온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주부로서, 엄마로서, 며느리로서 일상의 질곡에 맞서서 창작 활동을 이어오는 것은 당사자가 아니면 상상하기 힘든 어려움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어려움에 굴복하지 않고 이혜민이 작업을 이어온 정신은 혁명을 꿈꾸는 운동가의 그것과 본질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이다.
이혜민의 베개 역시 무심하게 버려질 수도 있었던 자투리 천에서 시작되었다. 작가는 어린 시절의 할머니에 대한 추억이 베개를 만드는 바느질 작업으로 자연스럽게 유도되었다고 기억한다. 이혜민의 이러한 작품들은 작가의 센티멘탈한 회상에서 출발하지만 하나하나 작가의 손을 거쳐 태어난 베개들이 모여서 마치 프랙탈 구조의 반복에서 오는 운동성과 확장성의 에너지를 느끼게 해준다. 작은 것 하나의 메시지와 에너지는 미미할 수 있다.하지만 이러한 미미함이 반복되는 현상은 점차 그 힘과 표현성이 증가되면서 작은 단위가 가진 본래의 성격과는 사뭇 다른 힘과 운동성을 띠게 된다.
이혜민의 작가로서의 일상이 순간순간 이어지고 작은 천 조각 하나하나가 시간의 경과에 따라 작가의 손을 통해 작품으로 태어나는 과정은 창작이면서 조용한 혁명(혁명이라는 용어가 버겁다면 저항)이다. 작가가 동의할지 모르겠지만 이혜민의 예술가로서의 창작과 혁명의 궤적은 작품으로 연결되는 것이며, 이번 전시에서도 높은 곳에서 유기체 동물처럼 흘러내리듯 공간을 부드럽게 지배하는 베개들로 만든 설치 작품과 캐나다 원주민 이누이트족(Inuit)들의 토템 폴처럼 수직으로 세워진 베개들과 이 베개들의 브론즈 캐스팅은 작가의 삶의 이력이며 신화이고 의식과 신념의 가시적 표현일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작업을 통해 이혜민은 부드러운 조형적 혁명, 또는 의식의 저항을 실현하려고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