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6.21 ~ 2018.08.12
전시소개
서도식 개인전
8월 19일까지 연장되었습니다.
길 위에서
I
금속을 재단하고 두드려서
둥글고 깊숙한 형태를 만드는 동안
내 삶을 유지해 왔던 이러 저러한 기억이
그 속에 차곡차곡 다져진다.
규칙적으로 반복되는 망치질에 의해서
새겨지는 금속 주름은
지구의 중력만큼 강력하고 자연스럽다.
서도식, 『작업 노트』
누군가 둥글고 깊은 형태를 짓고 있다. 항아리를 닮은 금속의 용기(容器)인데 쓰임을 쉬이 짐작할 수 없다. 선사시대의 토기처럼 군더더기 없이 근원적이다. 강물이 흐르듯 무심한 제작의 리듬 속에 금속이 단조(鍛造)되고, 감겨 올라가는 곡면과 함께 투명한 깊이를 품은 기물의 내면이 형성된다. 재료를 다루는 손길은 더없이 숙련되어 있지만, 거기엔 무언가를 몰두해서 빚고 있는 아이의 천진함이 아련히 깃들어 있다. 그래서 능숙함은 기예(技藝)로 넘어가지 않고 소박하게 이완된다. 작업은 일정한 계획을 따라 진행되고 있으나, 시작과 끝을 지켜는 일이 여기에선 그리 중요하지 않다. 제작의 과정에 오롯이 스며들고자 하는 지향만이 묵묵히 전달될 따름이다.
그 형태는 시간이 지날수록 고유한 깊이를 더해간다. 하지만 작업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여전히 알 수 없다. 해묵은 정체성으로 자아를 드러내고자 하는 욕구는 찾을 수 없고, ‘이제까지 내가 했던 일이 과연 무엇이었을까?’ 하는 물음만이 또렷하다. 오히려 홀가분하게 노출되는 것은 그 사람의 몸이다. 그는 육신 깊숙이 배어들어 숨 쉬듯이 이룰 수 있는 행위로서 자신의 형태를 짓는다. 몸 가는 데로 흐르는 제작의 물줄기는 작업하는 이의 발자취를 넉넉히 수렴하면서도 보편을 지향한다. 그러한 과정 속에 잉태되는 것은 아주 기본적인 형태이다. 그것은 흩어지는 것을 모을 수 있고, 흘러가는 것을 채울 수 있는 원통형의 용기이다.
그 형태는 그릇으로 쓸 수 있지만, 그릇으로 쓰기 위해서 제작된 것은 아니다. 또한 그것은 작품으로 감상 될 수 있지만, 작품으로 감상하기 위해서 제작된 것도 아니다. 그 형태는 풀이 돋고 꽃이 피듯 그 자체의 생기(生氣)로서 자연스럽게 자라난다. 그것을 제작한 사람도 그것의 쓸모를 모른다. 그는 단지 규칙적인 망치질에 몸을 맡겼을 뿐이고, 금속면에 새겨지는 주름에 매혹되었을 따름이다. 그러는 과정에서 둥글고 깊은 형태는 생성된다. 그것은 그 자체로서 자라날 뿐 아무런 목적을 지니지 않는다. 금속을 두드려 형태를 지었던 고래(古來)의 수많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도 자신이 짓는 형태의 생장(生長)을 본연(本然)으로 받아들이고, 그 형태의 내부에서 차오르는 생성의 기운에 평온하게 젖어든다.
II
오랫동안 축적된 금속공예 작업으로
조율된 근육의 움직임으로
기물의 곡면은 매끄럽게 감겨 올라간다.
어릴 적 집안에 마련된 제과 공장에서
능숙한 어른들의 손길을 재미삼아 따라했던
밀가루 반죽과 사탕 만들기 등의 기억들까지도
모두 여기서 다시 한 번 즐겨본다.
서도식, 『작업 노트』
육신이 작업에 몰두할 때 마음의 시간은 일직선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그것은 곧잘 역류(逆流)하여 현재에서 이탈 한다. 그 순간 마음은 일상에서는 좀처럼 마주할 수 없었던 과거의 영상(映像)과 조우하게 된다. 뜻 모를 상념의 형태로 솟아나는 그 영상은 ‘이제까지 내가 했던 일이 과연 무엇이었을까?’ 라고 물음을 끝맺지 않는 이에게 망각된 시원(始原)을 일깨운다.
그리하여 불현 듯 그의 마음에 자그마한 제과 공장의 실내가 펼쳐진다. 오십 여 년 전의 영상이다. 거기엔 능숙한 솜씨로 과자를 굽고 사탕을 만드는 어른들이 있고 호기심에 들떠 밀가루를 반죽하고 설탕을 만지는 한 아이가 있다. 멀찍이 그 풍경을 바라보던 그의 마음이 천천히 아이에게 다가선다. 놀이를 하듯 흥겨운 아이의 손길엔 자신감이 배어 있다. 어른들 곁에서 재미삼아 시작한 일이지만 제법 숙련이 되어 한 사람 몫을 한다. 그는 형태를 짓는 즐거움이 아이의 육신에 스며드는 것을 설레는 마음으로 지켜본다. 이와 함께 오십 년 전의 공장 풍경은 생생한 실감으로 되살아나고, 거기에서 비롯되는 행복감은 넋을 잃고 작업에 몰두하고 있는 그의 육신에 와 닿는다.
현재로 복귀한 그의 다음에 흔적으로 남은 것은 시간이 역류할 때 느껴졌던 생경한 운동감이고, 과거로 접어들었을 때 환기되었던 아련한 정서이다. 그는 자신이 짓고 있는 둥글고 깊은 형태의 내부에 그러한 운동감과 정서를 새기고자 한다. 그러나 이 때 적용되는 조형(造形)의 방법은 형태의 외형을 제작할 때와 사뭇 다르다. 여기서 주가 되는 것은 기계적인 자동성이다. 실제로 형태의 내부는 3D 프린터에 의해 제작되는 경우가 많은데, 이 때 구현되는 나선형의 소용돌이는 수공(手功)으로는 쉽게 나타낼 수 없는 무심한 운동감을 표출한다.
이처럼 상이한 조형의 방법이 선택되는 이유는, 형태의 내부에 새겨지는 것이 바로 ‘시간’이기 때문이다. 시간은 선험적인 조건으로서 몸과 마음에 영향을 끼칠 뿐 의지로 조율할 수 있는 무엇이 아니다. 심지어 그것은 역류하여 과거로 소급될 때조차 선험적인 조건으로 몸과 마음에 작용한다. 그러나 형태의 내부를 구현하는 그 사람의 지향은 형태의 외형을 제작할 때와 비교했을 때 상이해 보이지만, 궁극적으로는 유사하다. 외형을 제작할 때 자신의 자아를 드러내는 대신 형태를 제작하는 몸의 활동을 나타냈듯이, 내부를 구현할 때도 그는 자신의 자아를 드러내는 대신 형태를 제작할 때 경험되는 시간의 흐름을 나타낸다.
하지만 그 사람의 자아가 형태의 제작에서 온전히 물러나 있는 것은 아니다. 그의 자아가 능동적인 행위자로서 나타나는 지점은 색체이다. 그는 형태에 부여된 색채를 통해 몸의 활동과 시간의 흐름을 수용하는 자신을 정서를 환기시킨다. 옻칠로 구현된 그 색채는 선명한 원색을 띠고 있어, 둔중하게 내려앉는 금속의 물성에 차오르는 부력(浮力)을 선사한다. 그리고 자칫 막연하고 추상적으로 느껴질 수 있는 형태의 외형에 시각적인 활력을 부여하여, 교감을 이끌어낼 수 있는 실마리를 마련한다. 이것은 색체 스스로가 실행하는 일 아니라, 그 사람의 의지로 실행하는 일이다. 그는 몸과 시간이 짓는 형태가 본연(本然)의 양태로 나타나길 원하면서도, 그 모습이 아이들의 놀이처럼 즐겁고 편안하게 구현되기를 바란다. 이는 분명 그 어떤 익명자도 아닌 그 사람, 서도식의 바램이다.
III
이제 길 저편에서 잠시
마주하던 무지개가 사라지기 전에
나의 아름다운 시절을
왼손과 오른손의 움직임으로
차곡차곡 쌓고자 한다.
서도식, 『작업 노트』
둥글고 깊은 형태를 짓는 사람은 서도식이다. 그의 이름은 금속공예라는 예술의 범주와 함께 한다. 그리고 40년을 넘어서는 오랜 제작 활동과 교육 활동이 그 이름에 동반된다. 이 모든 것이 사회적 책무과 결부된 무거운 항목들이다. 이번 전시에서 서도식은 이러한 등짐을 내려놓고, 형태 짓기의 소박한 근원으로 되돌아간다. 여기서 그는 평생토록 작업을 수행했던 자신의 몸과 만나고, 그 육신에 스며있는 보편적인 형태와 마주한다. 또한 그는 작업의 과정에서 경험되는 시간을 섬세하게 되돌아보고, 그것이 일직선의 흐름에서 벗어나 과거로 소급되는 순간의 무심한 흐름을 형태에 옮겼다.
둥글고 깊은 형태가 나타내고 있는 제작의 행위는 서도식이라는 한 개인의 신체와 정신에 의해 실행되지만, 그것이 궁극적으로 드러내는 것은 한 개인이 평생토록 수행했던 형태 짓기에 깃들어 있는 본연(本然)의 즐김이다. 그러한 즐거움이 찾아오는 순간, 금속을 두드리고 곡면을 올리는 일은 끝맺을 이유가 없는 무상(無上)의 유희가 된다. 서도식의 이번 전시는 우리에게 형태 짓기의 행복으로 나아가는 오솔길을 제시한다. 그 길은 목적지에 닿는 것이 중요하지 않는 소박하고 아름다운 산책로이다.
글 _ 강 정 호
미술학박사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조소과 및 동대학원 졸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