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08.22 ~ 2013.09.29
전시소개
지금을 반성하는 질문들
심소미 (책임 큐레이터, 갤러리 스케이프)
현대미술의 기반이 되고 있는 모더니즘은 예술뿐만 아니라 우리 삶을 전반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미적 이데올로기이다. 모더니즘은 애초에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아방가르드로서 등장했지만, 이 또한 권력적인 심미안이 된 지금,도처에는 복제된 형식미가 가득 차 있다. 미술관의 유물이자 전형적인 아카데미적 성향을 대표하는 추상미술의 경우, 시작점에서 제시한 순수한 조형미로서의 형식은 미술뿐만 아니라 퍼블릭아트의 영역에서도 계속적으로 반복돼 오고 있다. 유영호의 작가로서의 입지는 개념적 화두를 생산하는 개념미술과 사회와의 상호적 교환 행위에 주목한 공공미술 사이에 걸쳐져 있다. 이런 그에게 있어 이번 개인전에서 보여주는 추상조각들의 미학적 의미를 반추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어 보인다. 그렇다면 그는 왜 이 시점에서 추상조각의 형식을 들고 나온 것일까? 필자는 그가 이번 작품들이 추상미술의 형식을 단순히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이를 통해 무비판적으로 수용된 미술사관이나 개념, 이데올로기의 형식에 지배된 현시대에 질문을 던지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작가의 이번 전시는 ‘반성’이라는 다소 무거운, 의미심장한 주제로 추상조각들을 다루고 있다. 기하학적인 추상 조각들은 전시 주제와 더불어 소재적으로도 이 무거움을 더한다. 추상조각들이 함의하는 모더니즘이라는 미술사적 맥락을 그가 취한 것은 지금 이 시대의 조형의식에 대한 비평적 사고를 바탕으로 한다. 그간 작품의 형식과 스타일에 개의치 않고 개념적 사고를 바탕으로 한 다양한 설치 작업과 프로젝트를 선보였던 그라, 본 전시에서 등장하는 기하학적 추상 조각들은 그 조형적 의미보다는 시각적 장치로서의 역할에 주목해야 한다. 메인 전시장에서의 추상 조각들은 선, 면, 입방체를 활용한 구조들이 패턴화된 것으로, 재료는 스테인리스, 나무와 같은 전형적 재료뿐만 아니라 고급예술과는 거리가 있는 골판지, 군복 등을 대안적 혹은 암시적 기호로서 사용하고 있다. 이 의미를 알 수 없는 막연한 추상조각들은 배후의 아이디어를 대변하는 장치들이다.
추상조각들의 배치를 전체적으로 조망해본다면, 전시공간의 양쪽에서 서로 마주보고 있는 대칭의 구조가 발견된다. 여기서 우리는 무엇보다도 작품 배치 방식에 있어서의 대칭의 형식에 의심을 품지 않을 수 없다. 작품 배치는 서로를 거울로 비추듯 정확히 같은 위치에서, 같은 형상이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대칭이자 평행한 구조를 지닌다. 그리고 이 거울 효과는 구상조각으로 표현된 두 사람을 통해 배가된다. 그렇다면 추상 조각들의 배열 사이로, 그는 왜 구상의 인물을 개입시킨 것일까? 거울을 들여다보는 듯 서로 마주한 인물 조각들은 전시의 전체적인 내용을 대변하고 있는 상징적 기호라 생각된다. 작가가 의도한 ‘대칼코마니같이 서로가 찍힌 것처럼 복제’된 공간 은 두 인물의 배치를 통해 서로 대척하고 있는 경계적 상황을 극대화 해 보이나, 다른 한편으로는 그가 말하는 ‘반성’의 의미를 짐작하게 한다. 그것은 대칭 혹은 대립처럼 보이는 이 상황이 사실은 거울을 보듯 자신을 바라보는 자기 반영적 구조로부터 비롯한다. 결국 반성이란 스스로를 반추하는 것이 아니던가?
작가의 의도된 배치 방식은 다른 공간에서의 작품들과 스토리 라인을 함께 한다. 추상조각들이 구성하고 있는 대칭의 공간은 지하 전시공간에 설치된 조명 작품을 통해 대립이라는 다소 적대적인 개념과도 맞물린다. 각기 빨강, 파랑의 빛을 바닥으로 비추고 있는 조명은 이데올로기적 흑백 논리로 인해 서로 교차될 수 없는 절대적 위치를 암시해 보인다. 이 공간과 상대적으로 로비 공간에 설치된 디스코볼의 경우 그 키치스러움이 화려하게 시각을 사로잡지만, 이 또한 일상적 기능에 앞서 원, 삼각, 사각의 기하학적인 추상의 질서를 바탕으로 추상조각화 된 것이다. RGB 컬러인 빨강, 초록, 파랑의 조명은 디스코볼의 움직임에 의해 서로의 꼴과 빛이 전시장 벽으로 반사되며 섞이게 되지만, 결론적으로는 백색인 추상적 성질로 복귀하고 만다. 세 공간을 통해 본 전체적인 전시의 구성은 크게 대칭-대립-혼재의 공간으로 스토리가 전개된다.
작가는 이러한 구조적 특질 뒤에 여러 개의 컨텍스트를 배경으로 두고 의도된 아카데미적 형식을 추상적 구조로 구현하고 있다. 여기서 기하학적 추상 조각의 형태적 상투성은 과장된 제스처로 더해졌으며, 이를 배치한 대칭, 대립, 혼재와 같은 공간 구성을 통해 역설적으로 예술 그 배후의 이념과 사회 정치적 이데올로기의 추상성을 강조한다. 하나의 의미로 읽어 내기엔 복잡한 시각적 장치들을 복선으로 사용하는 방식은, 작가가 의도적으로 작품의 스타일이나 공간의 디자인적 요소를 배제하고, 미적인 의미부여를 방해하고자 했던 기존의 작품들과 맥락을 같이 한다. 대칭의 공간은 2005년 아르코 미술관에서 선보인 ‘Infinity Corporation’에서도 시도된 바 있다. 대칭의 구조로 디자인된 텅 빈 샵의 공간은 상품가치가‘0’인 공간의 허무와 공허를 보여주는 동시에 비어있음의 무한대적 가능성을 암시하기도 한다. 지하층의 빨강, 파랑의 조명 설치 작업은 2005년 DMZ 전시에서 큰 스케일로 선보인 적이 있는 작업으로, 우리가 처한 정전의 상황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러한 정치적인 패러독스는 이번 작품에 영향을 준 배경 중 하나로, 정전의 형태와 더불어 우리 사회, 정치의 한 면이기도 하다. 남과 북, 여당과 야당, 진보와 보수 등 이 대립상태는 그 내용과 의미의 차이보다는 형식적 측면에서 절대성을 행사한다. 이러한 정치적 패러독스는 작품이 보여주는 의미없는 형식적 추상성과 대칭, 대립, 혼재된 전시 공간의 구성과 별다르지 않다. 서로 마주보면서 대립하며 섞이더라도 별 의미는 없는 상황인 것이다.
이렇듯 전시에 대한 배경은 비단 미술의 영역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이데올로기의 대립, 남북한의 정치상황은 대립이라는 형식의 추상성을 가장 극적으로 드러내는 지점이다. 본 전시의 형식적 특징에 대해 ‘형식과 구조는 의미보다는 형식과 구조 그 자체를 위해 존립한다.’는 작가의 말처럼 그 의미는 허약하고, 공허하다. 이는 단순히 추상의 형태를 지키기 위한 요소로서 공허의 형태를 지닌다. 물론 추상조각의 시작에서는 기성 미술에 대한 반성과 정치성이 있었다. 이러한 맥락은 이후 사라지고 순전히 형식만이 남았지만 추상성은 여전히 이 사회에 유효한 모습이다. 의미가 비어있는 추상성, 말 그대로 추상인 채로 남은 것이다.
작가는 이 전시에 대해 ‘이 시점에서 근원적인 얘기를 하고자 한다. 예술가로서 내 작업에 대한 반성뿐만 아니라, 사회적 역할, 미술, 정치적 의식 등 현재 우리사회의 시대상, 그리고 무엇보다도 한 인간으로서 스스로의 한계에 머물고 있는 내자신의 사고에 대해 반성해보자 한다.’고 언급하며, 추상적 조형의 형태와 형식주의의 구조를 빌려 우리의 사고체계와 현실적 상황의 현주소를 살피고 있다. 그는 반성이란 단어를 제시함으로써 서로에게 생성된 가치에 대한 대립적 상황과 그 내용의 공허함, 이로부터 끊임없이 반복되는 형식들이 부여하는 허상과 같은 가치들을 되짚고자 하는 것이다. 다소 수수께끼 같은 형식과 의미 사이에서, 작가는 몇 가지 전시의 키워드를 제공하고 있으나, 이를 접근하고 해석하는 방식은 관객의 몫으로 남겨두고 있다. 전시에 대한 관객들의 반영, 대칭, 대립 등 여러 상호적 관계로부터, 그 과정은 또 다른 반성을 공모해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