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11.19 ~ 2009.12.20
전시소개
Ⅰ. 에른스트 카시러(Ernst Cassirer)에 의하면 인간의 의식은 “상징 형식(symbolic form)”의 지배를 받으면서 진행되고 발전한다. 여기서 상징 형식이란 한 인간의 의식을 형성하는 모든 종류의 성장 배경을 뜻한다. 어떤 사람의 의식을 형성하는 성장 배경에 자기가 자라난 토대적 종교, 철학, 사회, 민족, 신화, 예술 등의 요소가 덧칠해지며, 민족과 사람, 계층, 성별에 따라 예술에 대한 의식은 다르게 마련이다. 따라서 미국의 예술과 독일의 예술은 다를 수 밖에 없으며 영국인이 보는 미국의 예술과 프랑스인이 보는 미국의 예술 역시 미묘하게 차이가 날 것이다.
Ⅱ. 노준의 예술이 있다. 노준의 예술은 친근하고 친숙하다. 따뜻하고 귀엽다. 누구나 단 한번에 그 어떠한 혼란도 없이 노준의
예술세계로 진입할 수 있다. 노란색의 강아지일수도 있고 노란색의 고양이일 수도 있다. 여하튼 친근하고 귀여운 캐릭터 인형 같다. 노준의 예술은 팝아트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팝아트는 이미 누군가 만든 이미지를 예술의 영역으로 끌어들이는 작업이다. 누구나 단 한번에 알아차릴 수 있게끔 의도된 예술 민주주의이다. 그런데
노준의 예술은 코카콜라 병이나 캠벨 수프 캔, 마릴린 몬로, 미키
마우스 등 모든 사람이 알고 있는 기존의 이미지가 아니다. 자기가 만들어낸 유일한 세계이다. 그런데도 바로 인식할 수 있고 그의 예술을 이해하는데 불편한 심기나 심오한 노력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그리고 노준을 예술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뉴욕에 사는 흑인 랩퍼의 시각과 아랍인의 상인의 시각, 한국의 여대생의 시각이 각기 다르게 작용할 리 만무하다. 제 각기
상징 형식이 다를 터인데도 말이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귀여움에서
연유한다. 어떤 대상에 대해 느껴지는 귀여움이라는 인지(recognition)는
어떤 대상이 보호본능을 일으켰을 때 나타나는 현상이다. 또한 이 인지는 장구한 세월 속에서 형성된 사회화된
코드이다. 어린 아이를 보았을 때 귀여움을 느끼며 그 아이를 보호하려는데 사회 계층이나 민족의 층위가
있을 리 없다. 선사시대부터 세대와 세대를 이으며 진화를 거듭하며 내면에 뿌리 잡힌 보편적 인식이기
때문이다. 우리 인간의 의식에 자리하는 이 귀여움이 가장 위대하게 발전된 형태는 바로 모성애이다. 자식을 바라보는 어머니의 마음속에 자리하는 귀여움보다 더한 것이 또 있을까?
노준이 생각하고 바라보는 세계는 바로 귀여움과 모성애에 관한 것이다.
Ⅲ. 통상적으로 사람들은 이 세계를 작동시키는 힘을 가리켜 사회적 욕망과 신체적 욕구로 파악한다. 그러나 노준은 이 세계를 형성하고 유지시킬 수 있는 보다 더 근원적인 힘을 모성애로 파악한다. 보다 더 근원적인 면에서 노준의 시각이 옳다. 그리고 노준은 이
보편적 위대함을 누구나 알기 쉬운 형식으로 전파시키려 한다. 바로 엔터테인먼트의 속성을 빌려서 말이다. 어떤 대상이 예술인지 아닌지에 대해서는 작품에 담겨있는 의미 즉 작가의 세계관을 읽으면 된다.
Ⅳ. 예술은 한 사람의 인생과 지식, 세계관을 모두 알아야 비로소 풀리는 기호인 만큼 난해하고 읽기 힘든 고역 그 자체이다. 더욱이 이 예술이라는 장르는 각종 미술기관의 높은 장벽에 의해 대중적으로 친근하지 않고 차단되어있다. 정형화된 화이트큐브 속에서 또 대좌나 페데스탈(pedestal) 위에서 차갑게 관객과 분리된다. 예술작품은 스펙터클(spectacle)이며 관객을 뜻하는 스펙테이터와는 존재적으로 애당초 다르다는 듯이, 그렇게 차갑게 분리되며 스펙테이터를 소외시키는 측면이 있다. 그러나 노준의 예술은 화이트큐브는 물론이며 놀이터나 공원과 같은 공적 장소마저 가리지 않는다. 더군다나 보는 것은 물론이며 아이들이 만지고 껴안을 수도 있는 접촉성 예술이다. 따라서 노준의 예술은 모성애라는 보편성으로 계층과 민족, 연령의 경계를 허물고 모두가 즐길 수 있는 해방공간의 기능을 수행한다. 산다는 것은 고뇌의 연속이며 지난한 세월의 압박이다. 그러나 적어도 노준의 클로(Clo)와 플로(Flo), 그리고 깜찍이(Kkamjigi)와 테미(Temmy)와 행복해 하는 아이들을 바라볼 때 우리는 찰나지만 지복한 희망을 맛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