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12.07 ~ 2018.01.27
전시소개
차승언의 작업에 관한 (2017년 12월 현재의) 미완성 메모
: 참조적 현대성의 향방에 관한 질문 몇 가지
임근준(미술·디자인 이론/역사 연구자)
하나. 차승언은, 예술적 가설(hypotheses)에 의해 전개되는 직조 행위/프로세스를 통해, 20세기 추상회화의 역사에 비평적으로 대응하는 21세기의 문제적 추상회화를 귀결시켜온, 참조적 현대성의 조형예술가다.
하나. 1999년 홍익대학교 섬유미술과를 졸업한 차승언은, 2002년 동대학 산업공예과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했고, 2010년 시카고예술대학 회화과에서 석사학위를 추가 취득했다.
하나. 스튜디오 섬유공예의 세계에서 출발한 차승언은, 2010-2011년경, 설치미술의 문법을 통해 공예적 프로세스를 특정성(specificity)의 시공에 펼치는 단계로 나아갔다가, 2011-2012년, 공예적 프로세스를 통해 현대미술의 역사를 재해석-확장하는 길로 작업의 방향을 선회했다. 정반합(thesis-antithesis-synthesis)의 진로 변경이 이뤄졌던 셈.
하나. 2013년 나는, “메모: 미술가 차승언의 참조적 직조 회화”에서 이리 단언한 바 있다:
“차승언의 작업이 지니는 특징은, 직조 행위를 참조적 전유(referential appropriation) 삼아, 인용되는 것과 인용하는 주체 사이의 거리를 표지하고, 그를 통해 현상학적 현대성을 의태-갱신해내는데 있다. 그의 직조 과정에서 긴요한 것은, 전유하는 약탈자의 자세―이른 바 ‘그림들 세대(Pictures Generation)’의 작업 태도에서 두드러졌던―가 아니라, ‘과거’와 ‘인용된 과거’로부터 적절한 거리를 유지 혹은 확보하는 시공간 감각이다. 2010년대의 일부 예술가들의 작업에서 발견되는 이러한 참조성(referentiality)을, 포스트모던 시대의 참조성이나, 모더니스트의 자기-참조성(self-referentiality)과 구별 짓는 특징이, 바로 그 2중의 거리감에 있다.”
하나. 2014년의 나는, “어떤 이야기: 좀비-모던의 상황과 인식; 차승언의 직조 행위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에서 이리 주장한 바 있다:
‘참조적 추상미술에서 핵심은, 독창적 (비)이미지와 그를 야기하는 돌출적 붓질에 있지 않다. 화면을 구성하는 표면적 요소들은 스킨을 구성할 따름이다. 오늘의 시점에서 중요한 것은, 매체의 재창안과 재발명을 통해 참조 대상들과 나 자신을 연관 짓는 섬세한 재맥락화의 감각이다. 쉽게 말해, 좀비-추상의 새로움은 조형적 요소들에 있지 않고, 그것들을 연결 짓는 특유의 유기적 메타-프로토콜에 있다. (좀비-포멀리즘[Zombie Formalism]의 계보에서) 여자 미술가들이 남자 미술가들보다 더 두각을 나타낼 수 있었던 것도, 재맥락화의 과정에 미세한 차이를 감지하고 평가하고 임베드하는 능력 면에서 여성이 우월했기 때문이다. 차승언의 직조 행위의 앞날도, 그래서 더 기대해봄직하다. 타자와 자신을 연관 짓는 여성 우위의 관계 감각과 소통 능력이, 참조적 직조 행위를 거쳐, 어떻게 메타 차원의 맥락을 더 재직조-포섭해낼는지 알 수 없다. (전후 한국의 추상미술이 거둔 성취를 참조 대상으로 삼는 작업을 본격화할 때, 비로소 작가는 최전성기에 돌입할 것으로 예상된다.)’
한국현대미술의 과거에 대한 반향과 발언으로서의 미술이, 동적 시공으로서의 내일을 지향-창출하게 되리라 기대했던 터.
하나. 지금까지 차승언은, 자신의 작업을 통해, 애그니스 마틴(Agnes Martin, 1912-2004)), 이우환(Lee Ufan, 1936-), 김환기(Whanki Kim, 1913-1974), 리처드 터틀(Richard Tuttle, 1941-), 이성자(Seund Ja Rhee, 1918-2009), 헬렌 프랑켄탈러(Helen Frankenthaler, 1928-2011) 등을 언급해왔다. 참조적으로 인용된 앞선 세대의 작업은, 헛주제가 되기도 했고, 담론적 재료가 되기도 했고, 알리바이가 되기도 했고, 개념적 외골격(conceptual exoskeleton) 혹은 개념적 지지체(conceptual supports)가 되기도 했다. 기술적 지지-연속체(technical supports continuum)로서 동원된 공예적 미디엄과 제작 도구와 숙련 노동이, 미적 미디어의 재창안을 통해 참조 대상을 부리는 일련의 과정에선, 늘 어떤 최적화의 감각과 시적인 감수성이 수반됐다.
하나. 한데, 흥미롭게도 차승언은, 평론가로부터 얻어낸 비평적 피드백마저 자연스럽게 제 작업의 개념적 질료이자 지지체로 삼아왔다. ‘기술적 지지체(technical supports)’란 용어 자체가, 기술적 미디어에 예술적 특정성의 논리를 부여한 메타 해석의 결과이듯, 차승언은 미술 평론과 미술사의 서사와 담론적 상황에 예술적 특정성의 감각과 논리를 부여함으로써, 자신의 작업을 위한 씨줄과 날줄에 새로운 차원을 임베드해냈다.
하나. 차승언의 작업이 배태하는 가능성을, 현대미술사 전개의 대전제에 맞춰 재고찰-유추-상상해보는 일도 흥미롭다.
전제 1. 순수평면(pure surface[reinen Fläche])의 자연주의적 재현 회화에 저항하는 현대적 의식이 현대회화를 태동했다. (비고: 폴 세잔에서 프랭크 스텔라까지.)
전제 2. 순수매스(pure mass[reinen Masse])의 자연주의적 재현 소조/조각에 저항하는 현대적 의식이 현대소조/조각을 태동했다. (비고: 오귀스트 로댕에서 리처드 세라까지.)
전제 3. 순수시간(pure time)의 자연주의적 재현 영화에 저항하는 현대적 의식이 현대미술로서의 실험영화를 태동했다. (비고: 아벨 강스 혹은 장 엡스탱에서 요나스 메카스 혹은 피터 쿠벨카까지)
전제 4. 회화의 순수평면과 소조/조각의 순수매스에 상응하는 순수공간(pure space)), 즉 화이트큐브에 저항하는 현대적 의식이 사회적/제도적 장소성의 미술을 태동했다. (비고: 앨프리드 바 주니어에서 로버스 스미슨까지.)
전제 5. 1, 2, 3, 4의 한계 지점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의 문제의식이 대두, 당대미술(contemporary art)의 새로운 장(수정된 역사로서의 오염된 시공)이 태동했다.
전제 6. 당대미술의 새로운 장에서, 전유를 통해 포집된 이미지는, 추상적 객체로서 작동하며, 추상과 이미지 사이의 관계와 동역학을 재설정했다. (인용된 이미지가 추상이 된다면, 반대로 추상은 이미지로 인용될 수 있었다.)
전제 7. 포스트모더니즘의 문제의식이 종언을 고한 2008년 이후의 상황에서, 일군의 작가들은 순수평면에의 저항선과 순수매스에의 저항선과 순수시간에의 저항선과 순수공간에의 저항선을 재설정-갱신함으로써, 불가능해 뵈는 진일보를 도모하고 있다.
차승언은, 순수평면에의 저항선을 재설정-갱신 혹은 재창안/재발명함으로써, 순수평면의 자연주의적 재현 회화에 저항하는 현대적 의식이 태동시킨, 현대회화의 주요 분수령과 종착점에 대응해왔다. 재설정-갱신 혹은 재창안/재발명된 회화-사물을 통해 조심스럽게 의사-조각적 영역으로 작업의 문제의식을 확장해왔지만, 아직 포스트-언모뉴멘털 조각(post-unmonumental sculpture)으로서의 발언권을 주장하지는 않고/못하고 있다. 만약 그가 기존의 작업을 확장해 순수시간에의 저항선과 순수공간에의 저항선을 재설정-갱신 혹은 재창안/재발명할 수 있게 된다면 어떨까?
자연주의적 시간-재현을 전제로 하는 서사적-극영화의 관습적 시퀀스 구조에 저항하는 실험영화 세대의 흐름이 있었고, 오늘날 그 문제를 바탕으로 새로운 포스트-시네마의 실험을 전개하는 이들이 있다. (기실, 촬영의 시간과 동영상 필름의 시간과 상영의 시간에 각각 특정성의 감각과 논리를 부여해 재구조화하는 실험은, 그 폭과 파장이 대단치 않았다. 마찬가지로, 포스트미디엄의 상황에 맞춰 서사적-극영화라는 올드 미디어-연속체를 재창안/재발명해낸 이들은, 길든 짧든 자신만을 위한 판단유예의 시공을 확보해낼 수 있었다.)
혹시 차승언이, 영화 시퀀스에 특정성의 김각과 논리를 부여했던 실험영화 세대의 메소드를 재활용하는 포스트-시네마의 전략을, 본인의 직조 작업에 임베드할 수 있게 된다면 어떤 결과가 나오게 될까? 포스트-시네마의 개념적 구조가 직조 행위/프로세스로 번역 혹은 전치된다면, 어떤 패턴이 가시화-물화될까?
하나. 차승언의 얼룩 연작은, 인프라플랫니스(infra-flatness)와 인프라리얼리티(infra-reality)의 차원에서 재고찰될 수도 있다. 하면, 2017년의 <능직얼룩(Twill Stain)> 연작에서 시도된, 김환기를 위한 얼룩, 서세옥을 위한 얼룩, 이우환을 위한 얼룩 등은 어떤 방식으로 해석될 수 있을까? (차승언이 물화해낸 얼룩은, 현상학적 현존성의 구현인가 현상학적 현존의 의태인가? 각 얼룩들은, 사실상 명시적으로 즉각 구별되지 않으려 애쓰고 있지만, 어디로 봐도 원본의 의태에 최선을 다하고 있는 모습은 아니다.)
하나. 차승언의 2017년작 <갑작스런 규칙-구역-1(Sudden Rule-Bay-1)>과 <갑작스런 규칙-구역-2(Sudden Rule-Bay-2)>는, 이성자와 헬렌 프랑켄탈러 작업의 어떤 차원을 전유하고 매시업해 만들어낸 메소드로 창작한 결과다. 작가는, 이성자의 1961년작 <갑작스러운 규칙(Subitement La Loi)>의 일부를 데이터로 취해 B&W 스케일로 전환했고, 그 질서를 자카드 기계직기로 직조해냈다. 작가의 설명은 다음과 같았다: “포토샵으로 만든 모티브 이미지에서 명도가 다른 각 픽셀 마다 다양한 패턴을 설계해서 넣었다. 어떤 픽셀은 가로와 세로 실을 분리해서 설계했다. 실은 약간의 광택과 내구성이 있는 폴리에스테르 사를 사용했다. 이성자 화백은 갑작스런 규칙 시리즈에서 나뭇조각에 물감을 찍어 물감을 교차시키거나 축적했는데, 결과물은 어찌 보면 직물을 닮았다.” 이성자의 작업을 참조적으로 전유해 제작한 직물을 스트레처에 멘 작가는, 다중적 지지체가 된 캔버스를 바닥에 놓고 7L정도의 검정색 염료를 도포한 뒤, 헬렌 프랑켄탈러가 즐겨 썼던 염색용 스폰지로 두드림으로써 일체의 스트로크 흔적이 남지 않도록 애썼다. 이렇게, 이성자로부터 추출해낸 지지체 위에서, 헬렌 프랑켄탈러를 참조적으로 지시-호명해낼 때, 역사적 가설로서의 새로운 문제들이 파생-제기된다.
하나. 상호 이질적인 이성자와 헬렌 프랑켄탈러를 매시업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 결과가 창출하는 시대교란적인 동역학은 무엇인가?
하나. 헬렌 프랑켄탈러의 방법을 수묵추상으로 전개해 새로운 시공을 창출해낸 여성 미술가가 있었다면, 그 모습은 어떠했을까?
하나. 누군가 수묵추상을 재창안/재발명해, 좀비-포멀리즘이나 좀비-포멀리즘 이후의 문제의식에 부합하는 작업을 시도한다면, 고개지의 의제였던 이형사신(以形寫神), 전신사조(傳神寫照), 천상묘득(遷想妙得)의 범주를 능격/신격/일격의 차원에서 넘나들며 해체-재통합/재범주화-파괴하는 일도 얼마든지 가능할 것이다. (하면, 한일중의 현대미술계에서, 추상이 허상이 되고, 허상이 다시 추상이 되는, 이미지-오브제로서의 수묵추상은, 왜 충분히 실험되지 못했을까?)
하나. 만에 하나, 차승언의 작업이, 그러한 가상적 수묵추상 실험의 장마저 포괄해낼 수 있다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