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9.02 ~ 2021.11.20
전시소개
Rereading Romanticism
낭만주의 재해석 展
하이테크놀로지 시대에 회화의 본향을 묻다
유년에 대한 기억과 낭만주의 소환
낭만주의 예술은 파괴와 창조의 끝없는 작용을 통해 어느 한 지점에의 고착을 멀리한 채 부유 상태에서 성찰적 작품을 생산한다. 포이에시스라고도 칭할 수 있는 이 간단치 않은 창작과정에서 작가는 감정에 함몰되지 않을 객관성을 필요로 한다. 느낌과 열정만으로는 포이에시스의 본질에 이르지 못하기 때문이다.
샌정의 회화는 일상을 지향하지 않는다. 그의 회화는 삶의 공간 너머 존재하지 않는 세계를 위태롭게 사유한다. 샤미소의 소설 주인공 페터 슐레밀이 회색 옷을 입은 남자에게 그림자를 판 후 그림자의 중요성을 뒤늦게 인식하게 된 것처럼, 샌정은 그림자라는 가상을 통해 그림자의 주인이라 할 페터 슐레밀을, 대상을 성찰하게 되는 것이다. 그가 이 작업을 수행하는데 거대한 장치는 필요치 않다. 캔버스, 팔레트, 붓이라는 원초적 물성을 통해 존재와 부재의 교차적 지점을 치열하게 포착해낸다.
샌정의 그림을 처음 접할 때 밀려드는 당혹감은 그의 회화적 언술이 불친절하다는 데 있다. 다시 말해 그의 작품은 회화에의 손쉬운 범접을 어렵게 한다. 샌정의 회화에 친숙해지기 위해서는 실패와 방랑을 통해 기술을 연마하는 과거의 기능공들처럼 우리 역시 다듬어지지 않은 돌길을 걸어야 한다. 감상자의 관점에서 어느 날 캔버스에 찍힌 인생의 점 하나를 우연히 발견한다. 이 우연은 오랜 바라보기 또는 지속적 대화를 통해 예기치 않은 방식으로 획득하게 되는 미적 결과물로 샌정의 다층적 지층이 이를 현실화시킨다. 이렇듯 캔버스 서사에서 물러나 있던 2차적 회화 요소가 의미를 획득하는 방식은 지극히 현대적이며 유머러스하기까지 하다.
샌정의 고유한 특징인 반투명의 회색 레이어들을 따라가다 보면 결코 균질적이지 않은 빛의 제국이 가만히 자신을 드러내 보인다. 이는 현대사회의 속도와 반비례하며 포스트모던 시대의 모던을 절감케 한다. 따라서 그의 회화가 무심한 듯 마음가는대로 그려졌다는 항간의 평은 첫 인상에 대한 거친 표현일 뿐 샌정 회화를 안내하는 독법이 결코 아니다.
한때 샌정은 칸딘스키와 몬드리안 사이에서 작업한다는 평가를 받은 적이 있다. 공간과 대상의 긴장감, 고유한 선과 색이 만들어내는 추상적 서사, 캔버스의 리듬감이 제시하는 방법론적 사례가 이를 말해준다. 그럼에도 샌정의 고유한 배경을 이루는 회백색의 물감 처리는 이른바 뜨거운 추상, 차가운 추상 혹은 ‘온도감이 묻어나는’ 추상이라는 형식 내용적 분리를 철회하는 계기가 된다. 샌정은 자연의 기본 요소에 집중한 형식주의자가 아니다. 그가 태어난 지역의 한옥과 문창에 발라진 한지, 마당의 채송화는 90년대 이래 독일에 살고 있는 이 낯선 예술가를 지극히 한국적으로 만든 요소들이다.
캔버스라는 평면의 입체적 잠재성을 고려할 때 샌정의 회백색 화면은 그가 독일로 유학을 떠나기 전 경험한 창공의 아득함과도 관련이 있다. 발터 벤야민의 “유년의 기억”을 소환하지 않아도 화가의 유년에서 발원한 모티브들은 돌이킬 수 없는 과거의 것이 되어버렸고 그 추억만이 회화의 물성에 아득히 녹아 헤엄치듯 부유한다. 샌정의 ‘자발적 혹은 비자발적’ 기억들은 기호가 되어 색과 이미지로 캔버스를 부유한다. 낭만주의 개념어인 ‘부유한다 schweben’는 어딘가에 “확고하게 고정되지 않고 스스로를 주변의 매체 속에 자유롭게 두는 것 sich ohne festen Halt frei in dem umgebenden Medium halten”을 의미한다. 아직 결정되지 않았고 의미결정성이 내려지지 않은 채 모종의 불가능성이 있음을 의미하는 ‘부유’는 샌정 회화의 특성이기도 하다.
후베르투스 호이엘 Hubertus Heuel은 유화라는 선명한 매체에서 동양적 분위기를 구현한 샌정의 특성에 주목한 적이 있다. 그의 말대로 과거에는 회화를 규명하기가 상대적으로 쉬웠다. 이른바 ‘사조 –ismus’가 해체된 후 작가들은 저마다 광야에 깃발을 꽂는 심정으로 미지의 세계를 개척할 운명에 처한 것이다. “그 해 그[샌정]에게는 예술에서 사라져가는 비탈길을 어떻게 하면 찬연히 표현할 수 있을지에 대한 생각이 일어난 것 같다. 그건 바로 부유하며 해체되는 기하학적 형상들, 광택 없는 회백색, 민감하고 부드러운 색감을 통해 이 일이 가능해졌다.”(Westfalenpost, Jan.17,2020)
독일 화단에서 샌정을 거론할 때 등장하는 여백미와 동양화적 특성은 그들에게 친숙한 18세기 낭만주의 화가 카스파 다비드 프리드리히의 회화를 연상시킨다. 바다와 숲, 산과 절벽 등 자연 풍경을 통한 무한자의 공간을 그린 그의 그림은 유한자로서의 인식적 한계를 성찰하게 한다. 예술의 본향인 낭만주의 시대로의 시간 여행은 이탈리아를 목적지로 교양 여행을 떠났던 과거 지식인들의 그랜드 투어를 상기시킨다. 낭만주의 회화가 예술의 중심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예술의 고향이라 일컫는 이유는 무엇인가? 광활한 자연에 대한 직관과 감정, 유한자로서 무한자를 향한 막연한 예감, 예술을 통한 정신의 고양과 종교적 상승감은 독일 낭만주의의 특징이자 예술의 특징이기도 하다. 2021년 <낭만주의 재해석>은 낭만과 모험이 사라진 하이테크놀로지 시대에 대가의 숨결을 소환하기 위한 일종의 제의와도 같다.
유동하는 현대에 고정성을 유념하다
“100년 전이라면 그렇게 그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당시 화가들은 안정성을 추구했다.” 하겐 오스트하우스 미술관장인 타이푼 벨긴 Tayfun Belgin은 샌정의 형상들을 통해 사회의 변화를 설명하였다. 샌정의 형상들은 확실함이 없는 우리 시대를 논하기에 적합한 매체이다. 고정적이고 안정적인 작동 방식이 통용되지 않는 현대는 지그문트 바우만의 표현대로 유동하는 현대이다. 전통적인 근대의 성질이 딱딱한 고체라 비유된다면 사회적 변화를 겪은 현대는 유동적이다. 개인의 삶 또한 견고한 성질의 것이 아니라 파편화된 채 불안을 내재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과거의 회화가 세밀한 관찰과 완벽한 묘사를 통해 단단한 외부 세계를 그렸다면, 샌정은 무상하고 덧없는 이미지의 출현과 사라짐을 특징으로 새로운 회화를 실현하고 있다. 이러한 작업은 기존의 것을 해체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로 잔잔해 보이는 그의 캔버스는 기실 격전을 벌이고 있는 중이다.
현실의 불완전한 빈틈을 유념하듯 그의 작품은 이름이 없으며 주요 상징물 또한 열린 상태이다. 도형의 벌어진 틈새 사이로 회백색의 배경과 추상적 오브제 사이를 공기가 오간다. 이렇게 발생한 대기감은 상호 소통하는 동시에 서로를 견제한다. 동양화적 특성을 보이는 샌정의 회화가 부유상태 Schwebezustand의 불안정한 현대적 특성을 담고 있다는 사실은 다분히 흥미롭다. 그를 이해하는 또 하나의 방식으로 미메시스가 있다. 손으로 잡을 수 없는 나비를 포기하고 그 대신 날갯짓에 몰입해 마침내 나비의 바람결을 느낀다는 어느 사상가의 글처럼 샌정은 미메시스적 행위를 통해 나비가 되어 사라져가는 회화의 본질에 다가선다. 샌정 회화의 이러한 특징은 색감과 기하학적 형상을 통해 표명된다. 그의 사각형은 질서정연한 몬드리안의 사각형과 달리 일그러지고 서정적이며 비대칭적이다. 선 또한 미적 관계를 고려할 뿐 조화와 균형미와는 거리가 있다. 한지의 수묵화를 연상시키는 투명하고 밝은 느낌의 회색 물감은 검은 색에서 하얀 색까지 농도를 달리해 다층적 스칼라를 형성한다. 이 빛은 “마리에 대한 추억”(브레히트)이 그러하듯 옛사랑의 얼굴이 피어올랐다가 이내 사라진다. 샌정 회화의 작동 방식은 지속적이기보다는 일회적이고 다층적인 것이다.
기본적으로 샌정 그림의 형상과 비형상 사이에는 낭만적 우울이라는 감정이 흐른다. 내면 깊숙한 곳에서 객관적인 근거 없이 일어나는 낙심, 또는 슬픈 정조는 시민 세계의 객관적 향방과는 결이 다르게 진행된다. 예술가의 정신세계를 의인화한 뒤러의 <멜랑콜리아 I>(1514)는 캔버스 이면에서 분주하게 움직이는 화가 자신의 정신적 자화상일 것이다. 이러한 자화상은 정면이 아닌 등을 관객에게 드러내 보인다. 카스파 다비드 프리드리히(1774-1840)의 <바닷가의 수도승>(1808-10)을 비롯한 대부분의 작품에서 광활한 자연 앞에 서 있는 주인공의 관조적 뒷모습에 주목했다. 그와의 내적 친밀성을 제시하는 샌정의 회화는 프리드리히의 주인공이 바라보았을 대자연의 깊이, 내적 동경의 세계라 할 수 있다. 프록코트를 입은 “안개바다 위의 방랑자”가 마주한 구름 속 풍경 역시 독일 낭만주의 정신이 향한 지점을 적시한다. 신비롭고 깊이를 알 수 없는 안개바다는 동양의 산수화에 깃든 정서감과 대비를 이루며 어느새 샌정의 캔버스에 내려와 있다. 이러한 관계망은 현실과의 유리를 말해주는 것이어서 삶을 회화의 세계로 안내한다.
단순한 화풍에 감각적인 회화를 생산하는 그의 작업 방식은 역설적이게도 철학적이다. 2016년 10월 <바자 아트>와의 인터뷰에서 샌정이 고백한 바, 캔버스를 지나는 붓질은 형이상학에 접근하는 시도이자 새로 일구어지는 생각의 텃밭으로서 사색 가장 안쪽의 존재론과 세계관을 형과 색에 담아 붓질을 함으로써 생각의 시각화 과정이 반복된다. 그의 그림은 혹자가 말하듯 앙드레 브르통의 자동기술법이나 영감에 의한 일필휘지가 결코 아니다.
화가가 ‘이것은 또 하나의 세계’라 규정 지으며 붓을 내려놓는 지점은 작가의 한계점이라 할 수 있는 완성과 비움의 교차적 시간이다. 현상의 배후에 있는 원상으로서 이데아를 상정했던 플라톤과 달리 예술가가 형상화한 ‘또 하나의 세계’라는 것은 니체의 예술론에 더 가깝다. 설사 작가가 진리라고 이름붙일 수 있는 절대적 순간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끝내 그 순간에 이르지 못하고 적정 지점에서 창작을 마무리하는 일은 ‘신은 죽었다’고 외치며 고정된 진리에 대해 예술의 우위를 주장한 니체 철학으로 이어진다. 신은 논쟁의 대상이 아니며 그런 의미에서 인식적 한계에 처한 인간에게 필요한 건 형이상학적 진리가 아닌 미적 진리인 것이다. 이 과정에서 샌정은 예술을 통한 숭고의 의미를 사유하고 캔버스는 미적 체험의 공간이 된다.
긴장과 이완을 제시하는 여러 형태의 선, 점, 사각형을 비롯한 기하학적 도형과 절제된 색채미는 샌정 회화를 규정하는 요소로 자리한지 오래다. 이들 도형과 선들은 화면의 중앙을 중심으로 비대칭적 구도로 스토리를 전개해 나간다. 추상적 구조물 사이로 여백미가 충만한 오묘한 빛의 배경이 깊이를 더한다. 느슨함과 긴장을 유념하며 회화 자체를 성찰하는 그의 창작 방식은 메타 언어적 성격을 띤다. 그의 회화는 회화라는 대상을 서술하는 또 하나의 회화로서 회화의 회화라는 철학적 특징을 보인다. 동시에 관념적 행위가 사유로 머무르지 않고 체화되고 제시된다는 점에서 선사시대 이후 지속되어온 회화의 정신을 돌아보게 한다.
샌정의 사각형은 “사유 안의 어떤 단단한 형이상학적 구조물에 대한 알레고리나 상징”(샌정, 바자르아트)에 가깝다. 형이상학적 구조물을 총체적 예술상징으로 이해할 때 그 구조물에 대한 알레고리는 총체성의 파편이라 할 수 있다. 총체성과 파편, 고전성과 낭만성, 이상과 현실은 역설적이게도 샌정의 작품을 규정한다. 모든 것이 낭만화되는 합일된 정신을 지향하기에는 그는 충분히 현실적이고 현대적 인물인 것이다.
그는 관찰과 직관, 파편을 통해 원본으로서의 총체성을 읽어내려 하며 조화와 균형이 사라진 현대에 총체성이라는 가상 대신 기하학적 도형, 점, 선을 통해 무너져 내린 세계를 구성해 낸다. 예술미와 조화미, 색채미를 통해 옛 그림을 이해하고 자신의 캔버스에 파편적 도상을 부유하듯 구조화하는 작업은 이중적 성격의 회화 정신을 드러낸다. 대립을 통한 세계 인식과 함께 샌정의 특기라 평가받는 색의 유려한 사용은 세계가 색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는 희망을 품게 한다. 그의 색은 오랜 시간 자연을 관찰하고 이름을 부여한 전통적 색채명과 연관된다. 쪽빛, 남빛, 하늘색, 쥐색 등 자연과 관련된 색명에는 관찰자의 시각이 반영되어 있다. 이는 전통적 색채의 유구함을 항변하는 동시에 내부적 눈에 의한 사물의 투사를 의미한다. 샌정 회화에서 지각되는 우수와 아련함은 이러한 자연적 색채와 관련되며 작가의 체험 및 감수성에서 발원한다.
<1 untitled, 2021, Oil on canvas, 160 x 200 cm>에 나타난 은근한 빛깔은 이 땅의 꽃들이 빚어낸 색의 제국이다. 파랑, 감색, 연두, 자줏빛 꽃들이 구름 무리가 되어 하늘에 걸려 있다. 창을 통해 내다 본 하늘에는 뭉게구름이 피어있고 그림 속 주인공은 그 속에서 한없이 투명한 유년의 기억을 길어 올린다. 화단에 핀 키 작은 꽃들을. 그 속에는 노란 빛과 붉은 빛의 채송화, 노란 빛의 원추리가 있고 장독대의 보랏빛 제비꽃, 달맞이꽃 그리고 민들레꽃도 보인다. 이러한 자연 색감은 근대적 물성이 빚은 회색빛 콘크리트의 막막함과 대치된다. 샌정의 빛은 물성으로서의 색을 넘어 그 색이 발원한 근원을 묻고 있다.
샌정의 “구름 낀 회화”(마리온 가이)는 또 다른 의미에서 세계를 반영하는 가상으로서 그림자 상이라 부를 수 있다. 검고 굵은 먹 선은 산과 구름의 그림자이며 산 정상의 작은 선(2 untitled 2021, 140 x 170cm)은 하늘을 나는 비행기의 그림자가 되기도 한다. 그의 회화는 문명을 흔적으로 남기고 자연만이 거대해지는 특징을 보인다. 간결하고 추상화된 상징적 표현 양식은 작가가 발췌한 일종의 그림자 상이라 할 수 있다. 샤미소의 『페터 슐레밀의 기이한 이야기』에서 회색옷의 남자는 그림자에 집착한다. 슐레밀의 아름다운 그림자를 갖기 위해 그는 금화가 쏟아지는 주머니를 거래의 수단으로 삼는다. 회색 옷의 남자는 “최후의 형이상학자”라 평가되는데, 그는 탈형이상학적 시대에 그림자라는 근원적인 형이상학적 요청에 얽매어 있기 때문이다.(Hörisch 1995, 28) 샌정의 작품을 보면 그가 오랫동안 그림자를 모으는 형이상학적 요청에 몰두해 온 것으로 보인다. 그의 회화 속에서 우리의 잃어버린 그림자를 만나게 되는 것이다. 이른바 그는 ‘견고한 것을 녹여’ 새로운 메타포를 형상화함으로써 삶을 낭만적 포에지 속으로 이끈다. 샌정의 회화는 자연과 도시의 이질적 공간에서 기억과 아쉬움이라는 양가적 ‘시간’ 현상에 기대어 동시대 회화가 모색할 바를 지향한다.
회화라는 장엄한 지층 구조
지질학에서 암석이나 토사가 축적된 지층은 이웃한 다른 지층과 구분되는 특징이 있다. 샌정은 동양적 감성의 추상 작가라 평가되지만 작품을 형성하는 요소들은 지층과 같이 크고 작은 규모로, 혹은 단단하고 부드러운 성질로 나누어 해석할 수 있다. 자연적인 힘에 의해 서로 평행하게 구조화되는 지층은 지구 내부의 힘을 받아 어긋나기도 하고 휘어지기도 한다. 지구에서 가장 오래된 37억년 된 스트로마톨라이트 화석은 그린랜드의 만년설이 녹으며 드러난 퇴적암인 이수아 그린스톤대 Isua Greenstone Belt에서 발견되었다.
고대의 생물이 외딴 지층에서 어느 날 문득 발견되듯 샌정의 추상에서 숨겨진 풍경을 찾아내는 일 또한 흥미롭다. 우리는 창문을 통해 외부 세계를 보기도 하고, 6개의 다채로운 광선다발을, 회색의 산들과 눈 덮인 산이며 거대한 새를 만나기도 한다. “어두운 바다가 육지를 향해 질주하고, 배경에는 회색의 산들이 비에 휩싸인 듯 보이며, 커다란 흰 산은 눈에 덮인 듯 보인다. 모티브는 그리도 모호하고 거의 숨이 멎을 정도여서, 우리는 아시아의 수묵화를 떠올리게 된다.”(Gay 2020)
샌정의 그림에 나타난 기하학적 형상들은 마리온 가이의 감상처럼 바다, 산, 눈, 웅덩이 등 다양한 자연물로 태어난다. 그의 기호는 신중히 암시된 자연이기도 하고, 해체된 자연의 자리에 들어선 미적 대상물이기도 하다. 이는 샌정이 세상을 대하는 방식과도 같아서 그는 세계를 세우기도 무너뜨리기도 한다. 샌정의 이미지가 우리에게 어떠한 의미로 다가온다는 것은 ‘언약의 돌판’처럼 있는 그대로의 ‘들어와 박힘’이 아니다. 그의 회화는 관객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오랜 길들이기를 필요로 한다. ‘네가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는’ 의미 창출의 순간은 대상의 본질에 다가서려는 시적 화자의 갈망 없이 실현되지 않는 것처럼, 감상자는 미적 순례자가 되어 샌정의 회화적 의미를 모색해야 한다. 그 지난한 과정에 위로가 되는 것은 전통색채에서 느껴지는 친숙한 색감이다. 그의 색은 합리적이고 효율적 배합이 아닌 사상과 감정을 토대로 작가의 주관적 인상이 묻어나는 색채이다.
<낭만주의 재해석>에서는 샌정 초기의 표현주의 색채가 발견된다. 그동안 그의 작품에서 기대하기 어려웠던 자유로움이다. 그의 내면에 공격적인 푄 바람이 불어 그의 캔버스는 온통 사물의 색으로 넘쳐난다. <12 Untitled 2021, Oil on canvas 50 x 40cm>의 경우도 이와 유사한데, 지중해에서 알프스를 넘는 푄 Föhn 바람이 불고 간 정경 같다. 푄은 지중해에서 알프스를 넘는 과정에 따뜻하고 건조한 바람으로 변한다. 고온다습한 돌풍에 한바탕 꽃이 피고 온갖 색의 향연이 거리를 수놓는다. 표현주의 회화의 강렬함과 내적 혼돈이 느껴지는 <12 untitled>는 트라클의 시를 읽는 것 같다. “[...] 푄 바람이 나무 우듬지를 거칠게 파고들었다.// 그러다 갑작스런 정적! 숨 막히는 고열이/ 나의 입에서 독기어린 꽃들을 피어나게 한다,/ 나뭇가지에서는 상처가 난 듯 창백하게/ 이슬이 명멸하며 떨어지고, 떨어진다 피처럼..”(Trakl, Das Grauen) 표현과 의미의 상충에서 오는 시적 긴장감은 낭만적 예술의 특징이자 샌정 회화에서 확인되는 생산적 내러티브이다.
<8 Untitled 2021, Oil on canvas, 100 x 80cm>의 네모난 형상들은 그간의 긴장을 풀고 용해되고 해체되어 흘러내린다. 샌정의 주제의식이었던 또 하나의 ‘텐션’이 마침내 무장 해제되는 순간이다. 그는 가벼움과 무거움 사이를 적당히 오가는 것을 즐기는 것 같다. 격정적인 색과 회오리치듯 재빠른 붓질이 있는가 하면 이러한 특징으로부터 변화를 가져오는 작품이 있다. <10 Untitled 2021, Oil on canvas 54 x 40cm>과 <11 Untitled 2021, Oil on canvas 54 x 40cm>에는 귀여운 이미지의 유년 시절의 기억이 묻어나는 것이다. 이 기억은 돌이킬 수 없는 아우라와도 같다. ‘공간과 시간으로 짜인 직물’(벤야민)인 아우라는 아무리 가까이 있어도 그 의미를 붙잡을 수 없는 일회적 특성인 것이다.
<낭만주의 재해석> 전의 지층에는 가벼운 속성의 드로잉 또한 들어있다. 드로잉은 화석이 되기 전 지구상에 생존했던 생물로 이해할 수 있다. 드로잉은 창작에 대한 첫 표지이자 날렵한 생각들의 모음집이지만 아이디어 잡아두기 과정을 지나 하나의 페인팅이 되는 경우가 빈번하다. 특히나 무제 20의 쪽빛 향연은 거무스레한 바위산과 대비를 이루며 우연의 산물 치고는 너무나 감각적인 형상을 하고 있다. 유화에서는 기대하기 힘든 샌정 특유의 선과 개성이 묻어나는 것이다.
세계를 이해하는 두 가지 방식이 <무제 12>에 들어있고, 분출하는 자연의 에너지는 <무제 13>에서 미적 고지를 선점한다. <무제 15 2021, 종이에 수채화>의 아름다운 정원 이미지 외에도 사각형의 무수한 변주가 진행되고 있다. 사각형은 샌정의 친근한 창문 이미지로 유화 작품에서 자주 등장하였다. 네모 형태의 창은 공간과 구조물 사이에서 외부를 조망하거나 스스로를 가두는 기능을 한다. 외부 세계와 내부세계를 이어주는 일종의 제3지대와도 같은 사각형은 모든 것이 허물어진 세계에서 안과 밖을 사유케 하는 문지방과도 같다. 샌정의 창이 하나의 독립된 지대이기는 하지만 우리는 그 문을 안과 밖을 향해 언제든 여닫을 수 있다. 사각형의 외부와 내부는 비움의 특성을 갖고 있어서 언제든 자유로운 자리이동이 가능하다.
<낭만주의 재해석> 전의 드로잉은 샌정의 작업 반경을 이해하는데 유용한 매체이다. 그는 순간순간 일어나는 생각을 잡아두기에 스케치는 접근성이 뛰어난 매체라 말하며, 독일과 한국을 오가는 동안 강박적이라 느낄 만큼 간단한 드로잉 도구를 늘 휴대한다. 관찰하고 기록하며 작업하는 그의 치밀함이 드로잉 기법에서 확인된다. 서울, 뒤셀도르프, 런던, 뉴욕 등지의 아카데믹한 공부를 기본으로 올드 페인팅과의 지속적 대화는 이 지칠 줄 모르는 화가를 겸허하게 한다. 두 나라에서 이미 상당한 이력을 확보한 샌정이 자신의 스터디 방식을 언급하고 진지하고 철저하게 일하는 방식은 그의 작품 세계를 구성하는 또 하나의 변곡점이다. 그는 그 누구보다 자기 자신에게 인정받는 예술가이고 싶은 것이다. 이번 전시는 샌정이 유화와 드로잉을 겸하는 작가라는 것을 말해준다. 샌정의 부드럽고 섬세한 유화 뒤에는 거칠고 강렬한 선의 드로잉이 존재했던 것이다. 그는 가벼움과 무거움이라는 두 매체의 차이를 오가며 유화 작업에 깊이와 밀도를 더했다고 규정할 수 있다.
<10 untitled 2021, watercolour on paper, 28 x 21cm>의 숱한 연필 선은 단순해 보이지만 이를 모방하기란 쉽지 않다. 라비린토스에 갇힌 미노타우로스를 죽이고자 스스로를 제물로 위장하고 크레타 섬으로 들어간 테세우스는 아리아드네가 건네준 붉은 실타래를 이용해 미로 탈출에 성공한다. 정교하게 설계된 미궁인 라비린토스에서 아리아드네의 실타래 없이 길을 찾기란 쉽지 않다. 샌정의 드로잉을 읽는 실타래는 아이러니컬하게도 샌정의 손이다. 그의 손의 행적이 그린 드로잉 선을 쫓다보면 미로와 같은 엉킨 실을 풀고 출구에 이르게 될지도 모른다.
행복한 시지포스
바다는 “우리에게 밑바닥을 알 수 없는 것, 무한. 무궁이라고 하는 관념”이라는 헤겔의 말을 되새길 때 측정할 수 없는 세계의 은유라 할 ‘바다’는 무한을 환기시키는 절대적 관념이다. 다양한 깊이감이 창출되는 겹겹의 바다는 다양하고 무궁한 생각을 개진시킨다. 무수한 파도, 깊이를 모르는 바다, 눈 앞에 펼쳐진 안개바다를 환기시키는 샌정의 회백색 배경은 산수화를 닮은 동양적 감성과 독일 낭만주의의 예술 감성을 동시에 견지한다. 이러한 특징으로 인해 그의 추상화를 유럽의 클래식 작품과 병렬적으로 전시하는 기획을 꿈꾸게 한다. 그의 회화는 물리적 시간과 구체성을 기반으로 진보해 나가기에 선행 작품과의 비교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이번 전시의 작품은 매우 아름답다. 기하학적 도형이 더욱 섬세해지고 따뜻한 감성의 색채가 특징적이다. 가만히 울려 퍼지는 오선지의 리듬감을 담아낸 것처럼 <4 untitled>의 마테호른에 걸린 섬세하고 강한 다섯 빛깔 선은 회색 기암괴석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 이들은 이내 부드럽고 강한 언어들로 변해 회색 창공에서 자연이 목격한 세계를 이야기한다. 샌정은 순수 추상화가로서 자신의 견고한 입지를 인식한 것으로 읽힌다. 이전 전시에서는 자신을 드러내는 주관적 붓질 대신 ‘사라져 가는 순수회화의 비탈길’을 이어 나가려는 듯 회화를 향한 순수의지가 표출되고 있는 것이다.
샌정이 20여년 거주하고 있는 라인강변의 뒤셀도르프는 슈만과 클라라의 도시이자 하이네의 고향이다. 음악과 문학이 어우러진 수준 높은 문화 전통과 함께 뒤셀도르프 화파 Düsseldorfer Malerschule(1819-1918)는 이 도시를 예술적 정취가 묻어나는 도시로 입지를 강화시킨다. 고전적 주제(신화, 기독교, 역사적 사건, 풍경화)와 낭만주의적 화풍, 3월 전기 Vormärz 영향으로 인한 사회비판적 요소는 그들의 화풍을 풍성하게 하였고 이들의 작품은 런던, 암스테르담, 브뤼셀, 파리, 시카고, 뉴욕에서도 파급력이 컸다. 예술은 사회적 산물이며 화가가 지내온 환경은 부지불식간에 그의 작업을 지배하는 요소가 된다. 쿤스트 아카데미를 거쳐간 수많은 예술가들 또한 이 도시가 이상적 회화를 모색하기에 손색이 없음을 보여준다.
샌정은 ‘바라보기와 물러서기’를 통한 회화적 독법에 주목한다. 경계인으로서 그의 삶은 그 어느 곳에서도 완전한 소속감을 느끼긴 어려웠을 것이다. 이러한 정체성은 바라보기와 물러서기라는 회화적 자세와도 상응한다. 캔버스를 마주한 작가의 태도는 사냥감을 앞에 둔 원시인의 눈빛을 예감케 한다. 외부적 대상에 대한 바라보기를 통한 사유의 결정체가 생산되는 시점인 것이다. 일정한 영역에서 마이스터가 되고자 유럽 전역을 방랑하며 스승의 공방에서 기량을 닦은 인력들이 있었듯, 회화적 동선에서 기꺼이 수련 생활을 하는 그의 행보는 회화의 본질에 다가서려는 열망에서 발원한다. 그의 작품이 녹록치 않은 이유이다.
샌정에게 회화적 정신이란 무엇일까? 진보하는 기술매체 시대에 그에 맞는 양식을 신중히 혹은 성급히 찾는 대신 이제는 낡은 개념인 아우라를 붙잡고자 붓질을 멈추지 않는 그는 어쩌면 시대착오적 인물일 수 있다. 그러한 샌정의 자세에서 시지포스의 형벌을 본다. 전통적 회화 매체와의 지속적인 대화는 굴러 떨어지는 바위를 끝없이 밀어 올리는 시지포스의 지난한 과업에 다름 아니다. 아폴론의 소를 훔치는 헤르메스, 제우스가 독수리로 변해 아이기나를 납치하는 장면을 목격한 시지포스의 운명은 처절하다. 신들의 비밀을 본 시지포스는 명계에 있는 바위산에서 커다란 바위를 산꼭대기로 올리는 형벌을 무한 반복한다. 자연의 비밀을 보고 이를 기록하려는 샌정의 운명이 그와 같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영겁의 시간 동안 바위를 밀어 올리는 시지포스의 형벌을 샌정 역시 진지한 태도로 수행하고 있는 듯하다. <5 untitled 2021, Oil on canvas, 162x130cm>는 이러한 생각을 확인시킨다. 바위와 운명 공동체가 된 시지포스처럼, 장인에 이르고자 동일 업무를 기꺼이 감당한 예비 마이스터들처럼 샌정의 시지포스-돌은 그와 하나가 되어 내부의 빛을 발한다. 그 찬연한 에너지는 그 어떤 구조물보다 견고하다. 이런 맥락에서 <5 untitled 2021, Oil on canvas, 162x130cm>는 2020년 노블레스 전시장의 거대한 헥타곤-보석과 병렬적 대비를 이루는데, 당시 헥타곤이 대기에 우뚝 솟은 자연의 결정체라면 2021년 산 정상에 도도하게 자리를 잡은 오색 바위는 인내를 기꺼이 감당한 작가의 결정체이다. 이런 의미에서 카뮈의 해석은 옳다. “산 정상을 향한 투쟁 그 자체가 인간의 마음을 채우기에 충분하다. 우리는 행복한 시지포스를 상상하지 않으면 안 된다.”
‘행복한 시지포스’라는 역설적 수사에는 현대 사회의 비애가 들어있다. 하이테크놀로지 시대에 낭만주의적 주제어인 신화를 소환하는 현대인의 마음엔 부조리에 대한 깊은 인식이 내재해 있다. 어떻게든 우리는 절대절명의 과업 앞에 겸허해질 수밖에 없다. 샌정 역시 인간의 지계로는 넘을 수 없는 불가능의 세계에 오르고자 오늘도 부단히 산을 오르는 시지포스를 꿈꾸는지도 모른다. 이렇듯 <무제 5, 2021, Oil on canvas, 162x130cm>는 티치아노 베첼리오의 ‘시지포스’가 온몸의 근육을 이용해 장구한 세월동안 굴려온 바윗돌에 대한 현대적 오마주라 할 수 있다.
2016년 10월 바자르아트에 실린 인터뷰에서 작가는 회화에 대한 답을 솔직히 열어 보인다: “긴 흐름에서의 그림 그리기는 혁명보다는 진화의 시간이 지배적이었다고 본다. 그리고 그 사이사이, 누적된 경험 뒤로 자연스럽게 회화의 근본을 직시한다고 생각한다. 작품에 임하다보면 한동안 이젤 앞의 캔버스를 응시할 때가 있는데, 그 시점에 작품 속에 있는 요소들을 새롭게 인지하게 되고 그 이후 새삼스레 미술사와 자신의 작품 세계를 보다 객관적인 거리에서 주시하는 시간을 거듭 접하게 된다.” 켜켜이 쌓인 샌정의 회화 탐구는 이렇듯 진지하고 밀도 있는 시간의 층위를 거친 ‘사유의 침전물’로 그 세계를 쉽게 열어보이진 않지만 의미를 알아내려 애쓰는 사람에게는 소리 없이 세계를 열어 보인다.
참고문헌
Ekkehard Mai: Die düsseldorfer Kunstakademie im 19. Jahrhundert – Cornelius, Shadow und die Folgen. In: Gerhard Kurz(Hrsg.): Düsseldorf in der deutschen Geistesgeschichte (1750-1850), Schwann, Düsseldorf 1984.
Pyl, Theodor(1888): “Quistorp, Johann Gottfried”. In: Allgemeine Deutsche Biographie. Band 27. Leipzig, 55-56.
Hörisch, Jochen(1995): Schlemihls Schatten – Schatten Nietzsches. Eine romantische Apologie des Sekundären. In: Athenäum, Jahrbuch für Romantik, Jg. 5, 11-42.
Schwarz, Sandra(2007): Kunstheimat. Zur Begründung einer neuen Mythologie in der neuen Mythologie in der klassisch-romantischen Zeit. Paderborn.
Ein Jahrhundert wird besichtigt: Die Düsseldorfer Malerschule. In: FAZ
신성엽 (연세대 강사. 독문학)
샌정 회화론
A painting is a transparent rectangular frame symbolically positioned somewhere around the center of the invisible forces from nature. Hence the tendencies and traits of an artwork are neutral, while the portions that have not been portrayed on the canvas remain as part of the celestial void beyond. Although it is not always clearly perceptible, the subject of such vastness situated within the artist’s instincts drives the artist to prepare the next blank canvas every time. Such indefinite nature of how art begins is because art is a mystical world that is hard to define and tangibly grasp. Once the paint from the palette touches the canvas, it enters the realm of the metaphysical. The blank white canvas possesses a depth and sense of atmosphere different from its surroundings. To stretch the metaphor further, the canvas itself is semantically the Big Bang and a black hole. The first stroke of the brush follows the collision of the artist’s many thoughts and ideas that eventually take their ambiguous place on the blank plane. The specified form of such ambiguity is abstraction. In that vein, my paintings in the framework of the metaphysical as I understand may be considered a painted philosophy or sorts. Although I contemplate based on the fundamentals of the primeval world view and existential theory, I can only deduce somethings from the fringes of the natural law, falling short of ever understanding that certain power. Even so, I manage to visually approach that which is impossible to comprehend. This is why I paint.
The masterpieces of both western and eastern schools of painting provide lessons of equal gravity. Less logos, pathos, and analytic than western paintings, the contemplative atmosphere of eastern ink wash paintings instill me with extra special inspiration. Whereas western paintings feel more dynamic and direct like sunlight, eastern paintings seem to relay meaning more passively and indirectly like moonlight. Sentimentally, I think the brightness of Romanticism is situated somewhere along the fringes of eastern painting. In other words, Romanticism is the western art style that is closest to eastern paintings, which placed particular emphasis on the fundamental nature of objects and their spirituality, almost to the point of idealism. In the process of recreating such domain of interest was born the current abstraction. The monochrome background that serves as the visible formal element on the canvas was likely influenced by ink wash paintings, while the colors and geometric shapes that sit on top are various allegories concocted within such reinterpreted Romanticism.
As a lay philosopher who presumes that the spirituality weaved from thought and reason beyond the scope of natural sciences laid the groundwork for academic philosophy, I didn’t find it all that strenuous to relate with Arthur’s Schopenhauer’s The World as Will and Representation even as I approached the book with much uncertainty in my early 20s, perhaps due to my eastern background. Or perhaps it was because I had long gazed into the world of idea (Ιδέα), which posits that only through art can one fly the highest and the farthest. Meanwhile, speaking of metaphysics and Romanticism reminds me of the German philosopher Friedrich Nietzsche. Nietzsche’s metaphysical position on cognition, existence, and values evokes the images of the drama present in Romantic art, mostly thanks to his exceptional philosophical attitude. My reflections on overcoming and transcending, which align with Nietzsche’s staple topics of rumination, naturally lead to two characters of Greek mythology: Sisyphus and Icarus. Parallel to this, I consider the time flowing in the studio as a solitude hued with certain colors, and approach the canvas with such idealistic reasoning. What I expect next is a complete work that culminates at the threshold of understanding on paintings. Therefore, at this point, my definition of “Romantic painting” as a painter would be “a personal drama that intuitively and proactively faces the world detected in the realm of an individual’s sentimentalities, created from the efforts to philosophically meditate on the meaning of the world given to us; at the same time, a visual drama wherein one seeks to find something in the surface of the painting from a combative standpoint.” The sentiments inherent in works of such atmosphere are melancholy and nostalgia, which are elements that take non-figurative forms absent of any specific images placed across the painting. The large frame that pertains to the composition of the painting is an “infinite vista” that begins from a certain point in time. Within that I strive to take the inspiration from nature and reach sublime beauty of abstraction as I understand it. If magical wonders can be found in art, I believe this may be one of those instances. The masterpieces one can experience in museums undoubtedly seemed to demonstrate the potential and meaning of paintings as something immortal. As a painter, I sometimes think “the world is a painting, and paintings open their worlds as if destined to do so.” Many slivers of such thoughts then scatter across the canvas. And when the visible and invisible worlds inevitably cloak each other in face of my sentimentality, the Dionysian intuition and Apollonian intuition clash with each other, striking up thunders and lightning. The following density of the pacified air that is still imbued with this electric energy is what I seek to capture as part of my background. If discussion of balance and harmony is possible in my work, I would dare to hope that the dramatic aftermath of these two divine intuition-storms accumulate into a certain image on my paintings. The works displayed in my exhibitions these days present the world view of my ideal thoughts thus far, in an attempt to open an absolute space within the absolute plane of the canvas.
Alongside such opinions, I hope that the awe, beauty, sadness, and ephemerality I experience in nature would be captured on the canvas in the framework of zeitgeist of passive perspectives and within abstraction. As I consider all things majestic or eternal to be the very essence of nature and the human mind, I hope each of my brushstrokes becomes a way to draw a bit closer to such truth in my wor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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